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이쇼 덴노 (문단 편집) == 개인사 == * 생각나는 것을 바로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. 지금이야 솔직하다고 평가해줄 수 있을지 몰라도, 당시에는 아버지와 대신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다보니 그들에게 모자라다는 이미지를 남겼다. 이 때문에 아버지 [[메이지 덴노]]와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 총리 등에게 항상 혼나야 했으나, 결국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했으며 그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다.[* [[데이메이 황후]]도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 총리를 싫어했다고 한다.] * 호기심과 질문이 많아서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보거나 만지고 끊임없이 "이게 뭐야?"라고 물어보곤 했다. * 보통 [[일본 황실]]이 [[와카]]를 즐긴 것과 달리 [[한시]]를 좋아해서 직접 한시를 짓기도 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평생 동안 무려 1,367수에 달하는 한시를 창작했다. 문학적 가치보다는 정경 묘사가 충실한 편이다. 평은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부황 [[메이지 덴노]]보다 낫다고들 한다. * 엄격한 환경에서 자란터라 규칙을 매우 싫어했으며 신분에 얽매이지도 않았다고 한다. 타인에게 친절하고 소탈한 성격으로 황태자 시절 [[교토제국대학]] 부속병원을 방문했는데 환자들에게 직접 말을 건네어 환자가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나 [[후쿠오카현]] 지사와의 대화 중 맞담배를 권한 일화, [[구마모토현]]에서 학생들의 [[수영]]을 구경하던 중 물이 차가운 걸 확인하고 중지시키기도 했다. 또 다이쇼 덴노를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그에 대한 호감이나 친근감을 드러냈으며, 다이쇼 덴노 역시 신분에 관계없이 얘기하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. 대인기피증이 심하며 무뚝뚝한 아버지인 [[메이지 덴노]]와는 극도로 대비되는 부분이다.[* 하지만 성격이 이랬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고, 갑갑한 궁중 생활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.] 또 행계 중 정해진 일정과 코스를 무시하고 골목길로 갈 것을 명령하거나 아침에 숙소를 벗어나 혼자 산책을 하여 아랫사람들을 매우 곤란하게 하는 등, 경호라는 의미에서는 피곤한 사람이었다. * [[영친왕]]과 대화해보고 싶어서 황태자 시절부터 덴노 시절까지 꾸준히 [[한국어]]를 공부했는데, 죽기 얼마 전 영친왕이 자신과 대면할 당시 한국어로 말을 걸었으나 병으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태였기에 한국어 같지 않은 한국어를 했다고 한다. 이를 보아 영친왕과는 그의 일본 유학 시절에도 사이가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. * 구 [[대한제국]] 황족들과 일본 황족들과의 결혼 당시, 다이쇼 덴노와 [[사다코 황후]] 내외는 [[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]]를 [[영친왕]]의 신붓감으로 정하고, 마사코의 아버지 [[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]]을 불러서 직접 명령했다고 한다. 이로 인해 모리마사 왕은 "내 큰딸 마사코가 황태자비가 되는 줄 알고 기대했더니 그런 폭탄을 떠맡아야 하냐"고 멘붕했다고 한다. * [[애연가]]로 황태자 시절부터 [[담배]]를 즐겼으며 다양한 종류의 담배를 피웠다. * [[정략결혼]]이었음에도 아내인 [[데이메이 황후]]와의 부부관계는 매우 좋았다고 한다. 아들이 넷이라서 [[후궁]]이 필요없기도 했지만, 당시만 하더라도 황실에서 [[일부일처제]]는 법적으로 명시되지 않아서 후궁을 충분히 둘 수 있었음에도 하나도 두지 않았다. 황후 역시 남편인 다이쇼 덴노를 사랑하여 남편이 요양 생활을 할 때 관례를 무시하고 직접 그를 돌보았고, 그가 사망하자 크게 슬퍼하며 영정 앞에서 시간을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. 그 영향인지 장남 [[히로히토]]도 애처가였고, 손자 [[아키히토]], 증손자 [[나루히토]] 역시 그런 선황을 본받아 애처가다. 히로히토는 아내 [[고준 황후]]가 오랫동안 아들을 못 낳고 있을 때 나온 후궁 논의도 모두 거절했다. * [[아버지]]로서도 상당히 좋은 사람이었다.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이후에도 [[메이지 덴노|아버지]], [[야나기하라 나루코|어머니]]와 거의 대면하지 못해 아버지가 애정을 주지 않는 등 쓸쓸히 자라서인지 부모가 되었을 때 다이쇼는 직접 자식들에게 애정을 쏟았다. 황태자 시절 즉위 전까지 직접 자식들과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거나 [[영화]]를 같이 보기도 했으며, 황손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내 교육시키던 일본 황실의 전통을 싫어해서 4남인 [[다카히토]]는 끝까지 부부가 키웠다. 자식들을 거의 보지 않아 평생 자식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던 [[메이지 덴노]]와는 극명하게 대조된다. 그래서 자식들과의 관계가 좋았으며 그가 사망했을 때 자식들이 크게 슬퍼했다. * [[기행]]으로 유명하다.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던지, [[카페트]] 위에서 신발을 양 손에 들고 [[맨발]]로 걸어다닌다는 소문이 유명한데, 대부분이 사실 여부가 불확실하여 다이쇼 덴노의 병약한 이미지 때문에 생긴 헛소문일 수도 있다. * 다이쇼 덴노는 병약하고 소극적이라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길 꺼렸다. 그래서 요양중에 한 번은 한 번이라도 [[국회]]로 행차하여 군주의 존재감을 나타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. 이때 다이쇼 덴노는 갑자기 '''공문서를 돌돌 말아 [[김밥]] 모양으로 만든 다음 그걸 [[망원경]]이라고 하며 [[국회]] 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.''' 그 후로도 공적인 자리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와 달라는 요청도 다시는 없었다고 한다. * 다만 이 사건을 다룬 기사들의 내용 중 다른 부분이 상당히 많고, 1950년대부터 갑자기 퍼진 소문이라,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. 다이쇼 치세를 보면 알다시피 이 시기 천황의 권위가 추락하고 자기 명령이 무시되곤 했으며, 원래는 공무를 보고 싶었지만 몸이 안 좋아서 막 스무 살이 된 맏아들 [[히로히토]]에게 대리청정을 시켜야 했기 때문에 헛소문일 가능성도 높다. * 황태자 시절부터 [[에도 막부]]의 마지막 쇼군 [[도쿠가와 요시노부]]와 친한 사이였다. 종종 같이 사냥을 하러 가기도 했으며, '케이키씨' '전하'라고 부르는 사이였다고 한다.[[https://www.webchikuma.jp/articles/-/456|#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